알 왈리드 1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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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 왈리드 1세는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프(재위: 705년~715년)로, 그의 아버지 압드 알말리크의 정책을 이어받아 영토 확장과 공공 사업에 힘썼다. 그는 동쪽으로 트란스옥시아나, 신드를 정복하고, 서쪽으로는 북아프리카를 넘어 이베리아 반도까지 세력을 확장했다. 또한, 다마스쿠스 우마이야 모스크, 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 메디나 예언자 모스크 등 대규모 건축 사업을 통해 이슬람 건축을 발전시켰다. 그는 통치 기간 동안 사회 복지 프로그램을 시행하고, 부족 간의 균형을 유지하려 노력했다. 알 왈리드는 715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치세는 우마이야 왕조의 번영기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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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 왈리드 1세 | |
---|---|
기본 정보 | |
이름 (한국어) | 알 왈리드 1세 |
이름 (아랍어) | الوليد بن عبد الملك بن مروان |
로마자 표기 | al-Walīd ibn ʿAbd al-Malik ibn Marwān |
칭호 | 아미르 알-무미닌 |
칭호 (번역) | 신의 칼리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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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치 | |
즉위 | 705년 10월 9일 |
사망 | 715년 2월 23일 |
선대 | 압드 알-말리크 이븐 마르완 |
계승자 | 술라이만 이븐 압드 알-말리크 |
왕조 | 우마이야 왕조 |
가문 | 마르완 가문 |
개인 정보 | |
출생 | 기원후 674년경 |
출생지 | 메디나, 헤자즈, 우마이야 칼리파조 |
사망지 | 다이르 무란, 시리아, 우마이야 칼리파조 |
매장지 | 바브 알-사기르 또는 바브 알-파라디스, 다마스쿠스 |
아버지 | 압드 알-말리크 이븐 마르완 |
어머니 | Wallāda bint al-ʿAbbās ibn al-Jazʾ |
종교 | 이슬람 |
배우자 | 움 알-바닌 빈트 압드 알-아지즈 Umm ʿAbdallāh bint ʿAbdallāh ibn ʿAmr ibn ʿUthmān ʿIzza bint ʿAbd al-ʿAzīz ibn ʿAmr ibn ʿUthman Nafīsa bint Zayd ibn al-Ḥaṣan Zaynab bint al-Ḥaṣan ibn al-Ḥaṣan Āmīna bint Sāʾīd ibn al-ʿĀs Shah-i-Afrid bint Peroz III (첩) Budayra (첩) |
자녀 | 알-아바스 이븐 알-왈리드 압드 알-아지즈 이븐 알-왈리드 우마르 이븐 알-왈리드 비쉬르 이븐 알-왈리드 마스루르 이븐 알-왈리드 야지드 3세 이브라힘 이븐 알-왈리드 ʿAnbāsa Marwān Muḥammad ʿĀʾisha (딸) Rawḥ Khālid Maslama Mansūr Tammām Mubashshir Jazʾ ʿAbd al-Raḥmān Yaḥyā Abū ʿUbayda Ṣadaqā |
업적 | |
통치 시기 | 정복 전쟁 확장 |
건축물 | 다마스쿠스의 우마이야 모스크 건설 |
2. 초기 생애
우마이야 왕조는 제2차 무슬림 내전으로 큰 위기를 겪었으나, 알 왈리드의 할아버지 마르완 1세와 아버지 압드 알말리크의 노력으로 극복되었다. 마르완 1세는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왕조의 통치를 회복했고, 압드 알말리크는 이라크, 이란, 아라비아를 재정복하며 칼리파조의 권위를 회복했다.
아랍-비잔틴 전쟁이 재개되면서 알 왈리드는 비잔틴 제국을 상대로 군사 행동을 이끌었다. 696년에는 말라티야와 알 마시사 사이 지역을, 697년에는 '아트마르'를 공격했다. 또한 698년에는 하지 순례를 이끌기도 했다.
700년 또는 701년, 알 왈리드는 시리아 사막의 요새 카스르 부르쿠 건설을 지원하여 팔미라와 아즈락 오아시스를 연결하는 교통로를 확보했다. 이는 베두인 부족의 충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된다.
2. 1. 출생과 가계
알 왈리드는 우마이야 왕조의 창시자이자 초대 칼리프인 무아위야 1세(재위 661년~680년) 치세 중 674년경 메디나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우마이야 가문 출신으로 무아위야의 먼 친척인 압드 알말리크이다. 무아위야가 시리아에 거주하는 우마이야 가문의 지류인 수프야니 가문에 속했던 반면, 알 왈리드의 일족은 헤자즈(메카와 메디나가 위치한 아라비아 반도 서부)에 거주하는 더 큰 지류인 أبو العاص بن أمية|아부 알 아스 이븐 우마이야ar 가문에 속해 있었다. 그의 어머니 왈라다 빈트 알 아바스 이븐 알 자즈는 6세기의 저명한 بنو عبس|바누 압스ar 부족의 족장 زهير بن جذيمة|주하이르 이븐 자디마ar의 후손이었다.683년 메카를 거점으로 하는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가 우마이야 왕조에 대항하여 칼리파를 칭하면서 이슬람 세계에서 제2차 내전이 발발했다. 그 결과 대부분의 지역에 대한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가 상실되자, 히자즈에 거주하던 우마이야 가문의 일족은 684년 압둘라 이븐 앗 주바이르에 의해 시리아로 추방되었다. 그러나 알 왈리드의 할아버지에 해당하는 일족의 원로인 마르완 1세(재위 684년~685년)가 추방지인 시리아에서 친 우마이야 왕조 아랍 부족들에게 칼리파로 인정받았고, 이러한 부족들의 지원을 얻은 마르완 1세는 사망할 때까지 시리아와 이집트에 대한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를 회복했다. 알 왈리드의 아버지 압드 알말리크는 마르완 1세의 뒤를 이어 우마이야 왕조가 잃었던 나머지 지역인 이라크, 페르시아, 아라비아를 692년까지 재정복했다. 그리고 이라크 총독 الحجاج بن يوسف الثقفي|알 하자즈 이븐 유수프ar의 강력한 지원을 받아 많은 중앙 집권화 정책을 실시했을 뿐만 아니라, 우마이야 왕조의 영토 확대를 위한 노력도 강화했다.
2. 2. 우마이야 왕조의 위기와 극복
우마이야 왕조는 제2차 무슬림 내전으로 인해 큰 위기를 겪었으나, 알 왈리드의 할아버지 마르완 1세와 아버지 압드 알말리크의 노력으로 극복되었다. 마르완 1세는 시리아와 이집트에서 왕조의 통치를 회복했고, 압드 알말리크는 이라크, 이란, 아라비아를 재정복하며 칼리파조의 권위를 회복했다.
692년, 아랍-비잔틴 전쟁이 재개되면서 우마이야는 아랍-비잔틴 국경 지대와 그 너머로 매년 원정을 시작했다. 알 왈리드는 아버지의 칼리프 시대 동안 696년, 697년, 698년, 699년에 원정을 이끌었다. 696년 여름 원정에서 그는 말라티야(멜리테네)와 알 마시사(몹수에스티아) 사이 지역을 급습했고, 다음 해에는 아랍 자료에서 말라티야 북쪽에 위치한 '아트마르'로 알려진 곳을 공격했다. 그는 또한 698년에 메카에서 연례 하지 순례를 이끌었다.
700년 또는 701년에 알 왈리드는 북쪽의 팔미라와 남쪽의 아즈락 오아시스 및 와디 시르한 분지를 연결하는 노선에 있는 카스르 부르쿠라는 요새화된 시리아 사막 전초 기지의 건설 또는 확장을 후원했다. 역사학자 제레 L. 바차라크에 따르면, 알 왈리드는 자발 세이즈 근처에 건설했는데, 이는 알 카리야타인의 작전 기지와 카스르 부르쿠 사이의 베두인 여름 야영지였을 가능성이 높다. 바차라크는 알 왈리드가 아랍 부족의 영토에 위치한 이 사이트를 사용하여 내전 동안 우마이야 가문에 매우 중요했던 그들의 충성을 재확인했을 것으로 추측한다.
2. 3.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
우마이야 왕조의 칼리파 압드 알-말리크 치세 중 696년부터 699년까지 알 왈리드는 비잔틴 제국을 상대로 매년 군사 행동을 이끌었다. 696년 하계 작전에서는 말라티아 (멜리테네)와 몹수에스티아 사이의 지역을 습격했고, 그 이듬해에는 아랍어 사료에서 아토마르로 알려진 말라티아 북쪽에 위치한 곳을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 698년에는 메카를 향하는 연례 순례 (하지)를 지휘했다.630년대 이슬람교도에 의한 시리아 정복 이래 비잔틴 제국에 대한 전쟁은 계속되었고, 689년에는 휴전 협정이 체결되었지만, 692년에 협정이 파기되어 분쟁이 재개되었다. 이 이후 우마이야 왕조는 아랍과 비잔틴 제국의 국경 지대 (수구르)뿐만 아니라 더 멀리 떨어진 비잔틴 영토를 향해 매년 군사 행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알 왈리드는 700년 또는 701년에 요새화된 시리아 사막의 전초 기지인 카스르 부르크의 건설 또는 확장을 지원했다. 이 요새는 북쪽에 위치한 팔미라와 남쪽에 위치한 아즈락 오아시스 및 와디 시르한의 분지를 연결하며, 최종적으로 메디나와 메카에 이르는 가도상에 위치해 있었다. 역사학자 제레 L. 바카라크에 따르면, 알 왈리드는 자신의 활동 거점이 있던 알-카랴타인과 카스르 부르크 사이에, 아마도 베두인의 하계 야영지로 자발 사이스를 건설했다.
2. 4. 카스르 부르쿠 건설
700년 또는 701년에 알 왈리드는 요새화된 시리아 사막의 전초 기지인 카스르 부르쿠의 건설 또는 확장을 지원했다. 이 요새는 북쪽에 위치한 팔미라와 남쪽에 위치한 아즈락 오아시스 및 와디 시르한의 분지를 연결하며, 최종적으로 메디나와 메카에 이르는 가도상에 위치해 있었다. 이러한 알 왈리드의 지원은 "아미르 알-왈리드, 신도의 지도자의 아들"이라고 새겨진 비문의 존재에 의해 뒷받침된다. 역사학자 제레 L. 바차라크에 따르면, 알 왈리드는 자신의 활동 거점이 있던 알카리야타인과 카스르 부르크 사이에, 아마도 베두인의 하계 야영지로 자발 세이즈를 건설했다. 바차라크는 제2차 내전 중에 알 왈리드가 아랍 부족의 영토 내에 위치한 이 야영지를 우마이야 왕조에게 극히 중요했던 아랍 부족들의 충성을 재확인하기 위해 이용했다고 추측하고 있다.3. 칼리프 즉위
알-왈리드는 아버지 압드 알-말리크의 중앙 집권화 및 확장 정책을 계승했다. 그러나 알-왈리드는 알-하자즈에게 크게 의존하여 칼리파국의 동쪽 절반을 자유롭게 통치하도록 허용했고, 알-하자즈는 알-왈리드의 내부 결정에 큰 영향을 미쳐 관료들을 추천하고 임명하거나 해고했다.
3. 1. 후계자 지명과 권력 승계
압드 알-말리크는 통치 말년에 알-하자즈의 지지를 받아 자신의 아들 알-왈리드를 후계자로 지명하려 했다. 이는 압드 알-말리크의 형제 압드 알-아지즈를 후계자로 정했던 마르완의 합의를 무효화하는 것이었다. 압드 알-아지즈는 후계자 자리에서 물러나기를 거부했지만, 704년 또는 705년 초에 사망하여 알-왈리드의 지명에 대한 주요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705년 10월 9일 압드 알-말리크가 사망한 후, 알-왈리드가 즉위했다.9세기 역사가 알-야쿠비(al-Ya'qubi)는 알-왈리드를 "키가 크고 거무스름하며 ... 콧등이 들창코이고 ... 수염 끝부분에 약간의 회색기운이 있었다"고 묘사했다. 그는 알-왈리드가 "문법에 맞지 않게 말했다"고 언급했다. 알-왈리드는 아버지의 분노에도 불구하고 코란이 쓰인 고전 아랍어(Classical Arabic)를 사용하는 것을 포기했지만, 측근 모두가 코란에 대한 지식을 갖추도록 요구했다.
알-왈리드는 기본적으로 그의 아버지의 중앙 집권화 및 확장 정책을 이어갔다. 압드 알-말리크와는 달리 알-왈리드는 알-하자즈에게 크게 의존했고, 그가 칼리파국의 동쪽 절반을 자유롭게 통치하도록 허용했다. 더욱이 알-하자즈는 알-왈리드의 내부 의사 결정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관료들은 종종 부총독의 추천에 따라 임명되거나 해고되었다.
3. 2. 성격과 통치 스타일
알 왈리드는 아버지 압드 알말리크의 중앙 집권화 및 확장 정책을 기본적으로 이어갔다., 아버지와는 달리 알 왈리드는 알 하자즈에게 크게 의존하여 칼리파국의 동쪽 절반을 자유롭게 통치하게 하였다. 알 하자즈는 알 왈리드의 내부 의사 결정에 강력한 영향을 미쳤으며, 관료들은 종종 그의 추천으로 임명되거나 해고되었다.9세기 역사가 알 야쿠비는 알 왈리드를 "키가 크고 거무스름하며 ... 콧등이 들창코이고 ... 수염 끝부분에 약간의 회색 기운이 있었다"고 묘사했다. 그는 알 왈리드가 "문법에 맞지 않게 말했다"고 언급했다. 알 왈리드는 코란이 쓰인 고전 아랍어를 사용하는 것을 포기했지만, 측근 모두가 코란에 대한 지식을 갖추도록 요구했다.
4. 영토 확장 정책
무슬림 정복은 압드 알 말리크 치세에 우마이야 왕조의 국내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킨 후 재개되었다. 알 왈리드 치세 동안 칼리파국의 군대는 "새로운 자극을 받았으며", 역사가 율리우스 벨하우젠의 표현에 따르면 "위대한 정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알 왈리드 재위 후반기에 우마이야 왕조는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했다.
동서 양쪽 변경에서 이슬람교도들의 정복 활동이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동부에서는 이라크 총독 알 하자즈 이븐 유수프의 지휘 아래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이 트란스옥시아나를, 무하마드 이븐 알 카심 알 사카피가 신드를 정복했다. 서부에서는 이프리키야 총독 무사 이븐 누사이르가 마그레브를 정복하고, 그의 부하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을 침공하여 히스파니아 대부분을 정복했다. 이러한 정복 활동을 통해 우마이야 왕조는 칼리파국의 영토를 크게 확장했으며, 막대한 전리품을 획득하여 우마르 시대에 버금가는 성과를 거두었다.
4. 1. 개요
무슬림 정복은 압드 알-말리크 치세에 우마이야 왕조의 국내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킨 후 재개되었다. 알-왈리드 치세 동안 칼리파국의 군대는 "새로운 자극을 받았으며", 역사학자 율리우스 벨하우젠의 표현에 따르면 "위대한 정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알-왈리드 재위 후반기에 우마이야 왕조는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했다.
동서 변방에서의 이슬람교도들의 정복 활동은 압드 알-말리크 아래에서 재개되었다.
4. 2. 동방 정복
압드 알 말리크 치세에 우마이야 왕조의 국내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킨 후 무슬림 정복이 재개되었다. 알 왈리드 치세 동안 칼리파국의 군대는 "새로운 자극을 받았으며" 역사가 율리우스 벨하우젠의 표현에 따르면 "위대한 정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알 왈리드 재위 후반기에 우마이야 왕조는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했다.
동부 변경에서의 확장은 이라크의 알 하자즈가 감독했다.
4. 2. 1. 트란스옥시아나 정복
압드 알 말리크 치세에 우마이야 왕조의 국내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킨 후 무슬림 정복이 재개되었다. 알 왈리드 치세 동안 칼리파국의 군대는 "새로운 자극을 받았으며", 율리우스 벨하우젠의 표현에 따르면 "위대한 정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알 왈리드 재위 후반기에 우마이야 왕조는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했다.동부 변경에서의 확장은 이라크의 알 하자즈가 감독했다. 그의 호라산 부총독인 쿠타이바 이븐 무슬림은 705년부터 715년 사이에 이전에 무슬림 군대가 쉽게 침투할 수 없었던 지역인 트란스옥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 여러 차례 원정을 시작했다. 쿠타이바는 706-709년에 부하라를, 711-712년에 호라즘과 사마르칸트를, 713년에 페르가나를 항복시켰다. 그는 주로 지역 통치자들과의 조공 동맹을 통해 우마이야 왕조의 종주권을 확보했는데, 이들의 권력은 그대로 유지되었다. 716년 쿠타이바가 사망하자 그의 군대는 해산되었고,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아랍의 약한 입지는 지역 군주들과 튀르기쉬 유목민들이 720년대 초까지 쿠타이바가 얻은 대부분의 이점을 되돌릴 수 있게 했다. 708년 또는 709년부터 알 하자즈의 조카인 무하마드 이븐 알 카심 알 사카피는 남아시아 북서부인 신드를 정복했다.
4. 2. 2. 신드 정복
압드 알 말리크 치세에 우마이야 왕조의 국내 반대 세력이 무력화된 후, 무슬림 정복이 재개되었다. 알 왈리드 1세 치세 동안 칼리파국의 군대는 "새로운 자극을 받았으며", 역사가 율리우스 벨하우젠의 표현에 따르면 "위대한 정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알 왈리드 1세 재위 후반기에 우마이야 왕조는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했다.708년 또는 709년부터 알 하자즈 이븐 유수프의 조카인 무하마드 이븐 알 카심 알 사카피는 남아시아 북서부 신드 지역을 정복했다.
4. 3. 서방 정복
압드 알-말리크 치세에 우마이야 왕조 내부의 반대 세력이 진압된 후, 이슬람의 정복 활동이 재개되었다. 알 왈리드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칼리파국의 군대는 "새로운 자극을 받았으며", 역사학자 율리우스 벨하우젠의 표현에 따르면 "위대한 정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알 왈리드 1세의 재위 후반기에 우마이야 왕조는 최대 영토를 확장했다.
서쪽에서는 알 왈리드 1세의 이프리키야(중앙 북아프리카) 총독이었던 무사 이븐 누사이르가 베르베르인들을 정복하고 마그레브 (서부 북아프리카)로 진격했다.
4. 3. 1. 이베리아 반도 정복
압드 알-말리크 치세에 우마이야 왕조 내부의 반대 세력이 진압된 후, 이슬람의 정복 활동이 재개되었다. 알 왈리드 1세의 통치 기간 동안 칼리파국의 군대는 "새로운 자극을 받았으며", 역사학자 율리우스 벨하우젠의 표현에 따르면 "위대한 정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알 왈리드 1세의 재위 후반기에 우마이야 왕조는 최대 영토를 확장했다.서쪽에서는 알 왈리드 1세의 이프리키야(중앙 북아프리카) 총독이었던 무사 이븐 누사이르가 하와라, 제나타, 쿠타마 부족의 베르베르인들을 정복하고 마그레브 (서부 북아프리카)로 진격했다. 708년 또는 709년에 그는 현대 모로코의 최북단과 최남단에 위치한 탕헤르와 수스를 정복했다. 무사의 베르베르 mawla(자유민 또는 피보호자)인 타리크 이븐 지야드는 711년에 히스파니아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을 침공했으며, 이듬해 무사의 지원을 받았다. 알 왈리드 1세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716년까지, 히스파니아는 대부분 정복되었다. 트란스옥시아나, 신드, 히스파니아 정복으로 얻은 막대한 전리품은 칼리프 우마르(재위 634년-644년) 치세 동안 무슬림 정복에서 축적된 양과 비슷했다.
4. 3. 2. 정복의 의의
알 왈리드 1세의 통치 기간은 이슬람 역사에서 "위대한 정복의 시대"로 불릴 만큼 주요한 정복 사업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그의 재위 후반기에 우마이야 왕조는 최대 영토를 확보했다. 서쪽에서는 이프리키야(중앙 북아프리카) 총독 무사 이븐 누사이르가 베르베르인 부족들을 정복하고 마그레브(서부 북아프리카)로 진격했다. 708년 또는 709년에 그는 탕헤르와 수스를 정복했다. 무사의 부하 타리크 이븐 지야드는 711년에 히스파니아(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을 침공했고, 이듬해 무사가 지원했다. 알 왈리드가 사망한 지 1년 후인 716년까지 히스파니아의 대부분이 정복되었다. 트란스옥시아나, 신드, 히스파니아 정복으로 얻은 막대한 전리품은 우마르(재위 634년-644년) 치세의 무슬림 정복에서 축적된 양과 비슷했다. 이러한 정복 활동은 칼리파국의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4. 4. 비잔틴 제국과의 전쟁
무슬림 정복은 압드 알-말리크 치세에 우마이야 왕조의 국내 반대 세력을 무력화시킨 후 재개되었다. 알-왈리드 치세 동안 칼리파국의 군대는 "새로운 자극을 받았으며", 역사가 율리우스 벨하우젠의 표현에 따르면 "위대한 정복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알-왈리드 재위 후반기에 우마이야 왕조는 가장 넓은 영토를 확장했다.알 왈리드는 이복형제 마슬라마를 자지라(상부 메소포타미아) 총독으로 임명하고 비잔티움과의 전쟁을 지휘하도록 했다. 마슬라마가 국경 지대에 강력한 기반을 구축했지만, 알 왈리드 재위 기간 동안 우마이야 왕조는 영토를 거의 확장하지 못했다. 오랜 포위 끝에, 비잔틴 요새 티아나는 함락되어 파괴되었다. 알 왈리드는 연례 또는 격년으로 이루어지는 비잔티움 원정에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그의 장남 알 압바스는 마슬라마와 함께 참전하여 명성을 얻었다. 그의 다른 아들들인 압드 알아지즈, 우마르, 비쉬르, 마르완도 비잔티움에 대한 약탈전을 이끌었다.
712년까지 아랍인들은 킬리키아와 유프라테스강 동쪽 지역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아나톨리아 깊숙이 침략을 감행했다. 714년 앙키라 약탈 이후, 비잔틴 황제 아나스타시우스 2세는 알 왈리드와 휴전을 협상하거나 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대표단을 보냈다. 대표단은 알 왈리드가 비잔틴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정복하기 위한 육해상 공격을 계획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알 왈리드는 715년에 사망했고, 콘스탄티노폴리스 포위전은 그의 후임자들 아래에서 수행되었으나, 718년에 아랍인에게 재앙으로 끝났다.
5. 지방 통치와 내정
알 왈리드는 시리아 대부분의 군사 구역(준드) 통치를 아들들에게 맡겼다. 알-아바스는 호메스(Jund Hims|준드 힘스ar), 압드 알-아지즈는 다마스쿠스(Jund Dimashq|준드 디마슈크ar), 우마르는 요르단(Jund al-Urdunn|준드 알-우르둔ar)을 통치했다. 팔레스타인 총독은 알 왈리드의 동생인 술라이만이 맡았는데, 그는 아버지 때부터 이 직책을 유지했다. 708년, 술라이만은 하자즈에게 쫓기던 Yazid ibn al-Muhallab|야지드 이븐 알-무할라브ar를 보호했다. 알 왈리드는 처음에는 이를 탐탁지 않게 여겼으나, 술라이만의 설득과 야지드의 벌금 납부로 그를 사면했다.
693년부터 700년 사이, 압드 알-말리크와 알-하지는 비잔틴과 사산 주화 대신 단일 이슬람 통화를 만들고, 시리아와 이라크의 행정 언어를 그리스어와 페르시아어에서 아랍어로 바꾸었다. 705년 또는 706년, 이집트에서는 알-왈리드의 이복형제 압드 알라가 그리스어와 콥트어 대신 아랍어를 행정 언어로 도입했다. 이를 통해 아랍어는 국가의 유일한 공식 언어가 되었고, 칼리프국의 세금 제도가 통일되었으며, 이슬람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
709년, 알-왈리드는 압드 알라 대신 쿠라 이븐 샤리크 알-압시를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했다. 쿠라 이븐 샤리크는 칼리프의 어머니와 같은 부족 출신이었다. 압드 알라의 부패에 대한 불만, 또는 충성스러운 인물을 임명하려는 의도가 작용했을 수 있다. 쿠라는 715년 사망할 때까지 효율적인 세금 징수, 이집트 군대 개편, 푸스타트 사원 복원 등의 업적을 남겼다.
알 왈리드는 히샴 이븐 이스마일 알-마흐주미를 헤자즈 총독과 하지 순례 지도자로 유임시켰다. 메카와 메디나는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도시였기에 이 직책은 큰 명예를 의미했다. 그러나 히샴은 사이드 이븐 알-무사입을 굴욕적으로 처벌한 일로 인해 706년에 해임되었다.
역사가 M. E. 맥밀란에 따르면, 히샴의 해임에는 왕가 내 정쟁도 영향을 미쳤다. 히샴은 알 왈리드의 이복동생 히샴 이븐 압드 알-말리크(훗날 칼리프 히샴)의 외할아버지였고, 히샴은 알 왈리드의 아들 압드 알-아지즈의 경쟁자였다. 알 왈리드는 사촌 우마르 이븐 압드 알-아지즈(훗날 칼리프 우마르 2세)를 후임으로 임명했다. 우마르는 알 왈리드의 여동생과 결혼했고, 알 왈리드의 아내와는 형제 관계였다. 우마르는 히샴에게 공개적인 굴욕을 주었는데, 이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우마르는 종교계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6년 임기 중 4년 동안 순례를 이끌었다. 707년에는 알 왈리드의 아들 우마르, 710년에는 알 왈리드 자신이 순례를 이끌었다. 알 왈리드가 시리아를 떠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우마르는 하자지에게 박해받는 이라크인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하고, 하자지의 박해를 알 왈리드에게 보고했다. 하자지는 우마르를 해임하도록 알 왈리드에게 요청했고, 712년, 알 왈리드는 히자즈가 반 우마이야 왕조 활동의 거점이 될 것을 우려하여 우마르를 해임했다. 이후 히자즈는 Khalid al-Qasri|할리드 이븐 압둘라 알-카스리영어(메카)와 Uthman ibn Hayyan al-Murri|우스만 이븐 하얀 알-무리영어(메디나)로 분할 통치되었고, 순례는 마슬라마 이븐 압드 알-말리크와 알 왈리드의 아들들이 맡았다.
684년 마르지 라히트 전투 이후, 시리아 아랍 부족들은 야만 연맹과 카이스 부족으로 나뉘었다. 압드 알 말리크는 691년 카이스와 화해했지만, 두 파벌 간의 경쟁은 계속되었다.
알 왈리드 1세는 군대와 행정에서 두 파벌의 균형을 유지하려 했다. 역사가 휴 N. 케네디는 칼리프가 경쟁을 통해 한 파벌의 독점을 막으려 했을 가능성을 제기했다. 알 왈리드의 어머니는 카이스 출신이었고, 카이시 관료들에게 혜택을 주기도 했다. 그러나 벨하우젠은 알 왈리드가 특정 파벌을 편애했다는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
카이스-야만 분열은 알 왈리드의 후계자들 대에 심화되었고, 이는 750년 우마이야 왕조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다.
5. 1. 시리아
알 왈리드는 시리아 대부분의 군관구를 아들들에게 맡겼다. 알-아바스는 홈스, 압드 알-아지즈는 다마스쿠스, 우마르는 요르단에 배정되었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알 왈리드의 형제 수라이만이 아버지에 의해 총독으로 임명되어 알 왈리드 치하에서도 그 직을 유지했다. 수라이만은 708년에 하자즈의 감옥에서 도망친 야지드 이븐 알-무할라브를 보호했는데, 야지드는 축출된 호라산의 총독이었다. 처음에는 탐탁지 않아 했지만, 알 왈리드는 수라이만의 로비와 하지가 야지드에게 부과한 막대한 벌금 지불로 인해 야지드를 사면했다.알 왈리드는 시리아의 대부분의 군사 구역(준드) 통치를 아들들에게 맡겼다. 알-아바스는 호메스(Jund Hims|준드 힘스ar), 압드 알-아지즈는 다마스쿠스(Jund Dimashq|준드 디마슈크ar), 우마르는 요르단(Jund al-Urdunn|준드 알-우르둔ar)을 받았다. 한편, 팔레스타인 총독은 이미 알 왈리드의 동생인 술라이만이 아버지로부터 임명되었으며, 알 왈리드 아래에서 계속 팔레스타인 총독을 맡았다. 술라이만은 708년에 하자즈에 의해 호라산 총독에서 해임되어 투옥된 후 도주한 Yazid ibn al-Muhallab|야지드 이븐 알-무할라브ar를 보호했다. 알 왈리드는 처음에는 이 행위를 비난했지만, 술라이만의 설득과 하지가 야지드에게 부과했던 무거운 벌금 지불로 야지드를 사면했다.
5. 2. 이집트
693년에서 700년 사이에 압드 알-말리크와 알-하지는 이전에 사용되던 비잔틴과 사산 주화를 대신하여 단일 이슬람 통화를 확립하고, 그리스어와 페르시아어를 각각 시리아와 이라크의 관료 체계 언어인 아랍어로 대체하는 이중적 과정을 시작했다. 이러한 행정 개혁은 알-왈리드의 치세 동안 705년 또는 706년에 아랍어가 이집트의 디완|divanar (정부 부처)에서 그리스어와 콥트어를 대체하면서 계속되었다. 이 변화는 알-왈리드의 이복 형제인 압드 알라, 즉 압드 알-말리크가 임명한 이집트 총독에 의해 시행되었다. 이러한 정책은 아랍화의 점진적인 전환을 통해 아랍어를 국가의 유일한 공식 언어로 만들고, 칼리프국의 다양한 세금 제도를 통일했으며, 더 이념적인 이슬람 정부 수립에 기여했다.709년, 알-왈리드는 압드 알라를 자신의 카티브|katibar (서기)인 쿠라 이븐 샤리크 알-압시로 교체했는데, 그는 칼리프의 어머니와 같은 부족 출신이었다. 이는 이슬람 통치 하에서 이집트에서 처음으로 기록된 기근의 원인으로 지목된 압드 알라의 부패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거나, 충성스러운 인물을 총독으로 임명하려는 의도 때문이었다. 쿠라 이븐 샤리크는 715년 사망할 때까지 봉사하며 보다 효율적인 세금 징수 방안을 마련하고, 이집트 군대를 개편했으며, 알-왈리드의 명령에 따라 푸스타트 사원을 복원했다.
5. 3. 헤자즈
알 왈리드는 처음에 히샴 이븐 이스마일 알-마흐주미를 헤자즈의 총독이자 하지 순례의 지도자로 유임시켰다. 이슬람의 가장 성스러운 도시인 메카와 메디나는 종교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 두 직책은 강력한 위신을 동반했다. 히샴은 압드 알-말리크 통치 기간 동안 후계자 왈리드에 대한 충성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메디나의 저명한 학자 사이드 이븐 알-무사입에게 채찍질 형벌로 굴욕을 주었는데, 이 행위를 문제 삼은 왈리드는 706년에 히샴을 해임했다.역사가 M. E. 맥밀란에 따르면, 이 해임은 왈리드의 "의분" 외에도 왕가 내의 정쟁이 히샴의 해임을 명령하는 동기가 되었다. 히샴은 왈리드의 이복 동생인 히샴 이븐 압드 알-말리크(훗날 칼리프 히샴, 재위: 724년 - 743년)의 외할아버지였으며, 히샴 이븐 압드 알-말리크는 왈리드가 자신의 뒤를 잇기를 간절히 원했던 아들 압드 알-아지즈에게 경쟁자가 될 후계자 후보 중 한 명이었다. 왈리드는 이러한 입장에 있는 이복 동생 히샴의 근친에게 이슬람 성지의 지휘를 맡기는 대신, 사촌인 우마르 이븐 압드 알-아지즈(훗날 칼리프 우마르 2세, 재위: 717년 - 720년)를 후임으로 앉혔다. 우마르는 왈리드의 여동생 파티마의 남편이자, 왈리드의 아내 Umm al-Banin bint Abd al-Aziz|움 알-바닌 빈트 압드 알-아지즈영어(아들 압드 알-아지즈의 어머니)의 형제이기도 했다. 왈리드의 명령으로 우마르는 히샴에게 공개적으로 굴욕을 주었는데, 이는 메디나의 총독에서 해임된 자에게 전례 없는 행위였으며, 맥밀란에 따르면 "위험한 선례"가 되었다.
우마르는 양쪽 성지의 종교계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리고 6년에 달하는 임기 중 적어도 4년은 순례를 지휘했다. 나머지 2년 중 707년은 왈리드의 아들 우마르, 710년은 왈리드 자신이 순례를 지휘했지만,이는 왈리드에게 칼리프 시대에 유일하게 시리아를 떠난 사건이 되었다. 우마르는 정치적인 이유로 하자지의 박해를 피해온 이라크 사람들에게 안전한 피난처를 제공했고, 하자지의 박해를 왈리드에게 보고했지만, 이에 대해 하자지는 이라크의 반역자를 받아들인 우마르를 해임하도록 칼리프에게 진언했다. 제2차 내란 때처럼 히자즈가 다시 반 우마이야 왕조 활동의 거점이 될 것을 경계한 왈리드는 712년에 우마르를 해임했다. 그리고 히자즈의 통치권을 분할하여, 하자지가 추천한 Khalid al-Qasri|할리드 이븐 압둘라 알-카스리영어를 메카, Uthman ibn Hayyan al-Murri|우스만 이븐 하얀 알-무리영어를 메디나의 총독으로 임명했다. 다만 양자가 순례 지도자로 임명되지는 않았고, 왈리드는 그 역할을 마슬라마 이븐 압드 알-말리크와 자신의 아들들에게 위임했다.
5. 4. 부족 간의 균형 정책
684년 마르지 라히트 전투 결과, 우마이야 왕조 군대의 핵심이었던 시리아 아랍 부족들 사이에서 분열이 일어났다. 마르완 1세를 지지하는 부족들은 예멘의 조상을 암시하는 야만 연맹을 결성했고, 카이스 또는 북부 아랍 부족들은 대체로 이븐 알-주바이르를 지지했다. 압드 알 말리크는 691년에 카이스와 화해했지만, 시리아 군대가 점차 권력을 얻어 지방에 배치되면서 두 파벌 간의 영향력 경쟁이 심화되었다.알 왈리드 1세는 군대와 행정에서 두 파벌의 세력 균형을 유지하려는 아버지의 정책을 유지했다. 역사가 휴 N. 케네디는 "칼리프가 한 파벌이 권력을 독점하지 못하도록 경쟁을 유지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했다. 알 왈리드의 어머니는 카이스 계보에 속했고, 그는 카이시 관료들에게 특정한 이점을 부여했다. 그러나 벨하우젠은 알 왈리드가 한 파벌을 다른 파벌보다 선호했다는 데 의문을 제기하며, "그럴 필요가 없었고 중세 역사가들은 보고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카이스-야만 분열은 알 왈리드의 후계자들 밑에서 더욱 심화되었고, 그들은 그의 균형 정책을 유지하지 못했다. 이 분쟁은 750년 우마이야 왕조의 멸망에 주요 원인이 되었다.
6. 공공 사업과 사회 복지
알-왈리드는 빈곤층을 위한 재정 지원과 장애인을 위한 간병인 제공 등 사회 복지 프로그램을 시행했다. 그러나 이러한 복지 프로그램은 시리아 지역에 한정되었고, 그 대상 또한 아랍 무슬림으로 제한되었다. 역사학자 샤반은 이러한 정책을 "지배 계급에 대한 특별 국가 보조금"으로 평가했다.
6. 1. 공공 사업
알 왈리드는 즉위 후 정복 활동으로 얻은 재화와 세수를 재원으로 칼리프 국가에서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의 공공 사업과 사회 복지 사업에 착수했다. 알 왈리드와 그의 형제, 아들들은 시리아의 가도변에 숙소를 건설하고, 우물을 파고, 도시에 가로등을 설치했다. 또한 관개수로와 운하를 포함한 토지 개간 사업에 투자하여 농업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알 하지즈 또한 이 시기에 이라크에서 관개와 운하 관련 사업을 실시하여, 오랜 전란으로 손상된 이라크의 농업 기반 시설 회복에 힘쓰고, 복귀한 주민의 고용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알 왈리드 또는 그의 아들 알 압바스는 714년에 다마스쿠스와 베이루트 사이에 안자르를 건설했다.

이 도시에는 모스크, 궁전, 주거 시설, 상업 시설 및 행정 기관이 있었다. 미술사학자 로버트 힐렌브란트는 안자르에 대해, 아마 건설된 지 40년도 안 되어 버려졌음에도 불구하고, "750년 이전에 연대 추정이 가능한 모든 이슬람 세력에 의한 도시 건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헤자즈에서 알 왈리드는 지역 전체에 우물을 파게 하고, 고갯길을 통과하는 교통 편의를 개선하며, 메카에 분수식 물마시는 곳을 설치하여 메카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려고 했다. 역사학자 M.A. 샤반은 알 왈리드가 시리아나 헤자즈의 도시에서 실시한 사업에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주로 도시에서 증가하고 있던 비 아랍계 주민에게 저렴한 노동력 형태로 고용을 제공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추측했다.
사회 복지 사업에는 빈곤층에 대한 재정 지원이나 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한 간병인 제공 등이 포함되었지만, 이러한 노력은 시리아에 한정되었고, 더 나아가 아랍계 이슬람교도만을 대상으로 했다. 이 때문에 샤반은 이를 "지배 계급에 대한 특별한 국고 보조금"이라고 간주했다.
6. 2. 사회 복지 프로그램
알 왈리드는 즉위 후 정복 활동으로 얻은 재화와 세수를 재원으로 칼리프 국가에서 역사상 전례 없는 규모의 공공 사업과 사회 복지 사업에 착수했다. 알 왈리드와 그의 형제, 아들들은 시리아의 가도변에 숙소를 건설하고, 우물을 파고, 도시에 가로등을 설치했다. 또한 관개수로와 운하를 포함한 토지 개간 사업에 투자하여 농업 생산성을 향상시켰다. 하ัจัจ도 이 시기에 이라크에서 관개와 운하 관련 사업을 실시하여, 오랜 전란으로 손상된 이라크의 농업 기반 시설 회복에 힘쓰고, 복귀한 주민의 고용을 확보하려고 노력했다.
알 왈리드 또는 그의 아들 알 압바스는 714년에 다마스쿠스와 베이루트 사이에 안자르를 건설했다. 이 도시에는 모스크, 궁전, 주거 시설, 상업 시설 및 행정 기관이 있었다. 미술사학자 로버트 힐렌브란트는 안자르에 대해, 아마 건설된 지 40년도 안 되어 버려졌음에도 불구하고, "750년 이전에 연대 추정이 가능한 모든 이슬람 세력에 의한 도시 건설 중에서 가장 주목할 만하다"고 말했다.
히자즈에서 알 왈리드는 우물을 파고, 고갯길 통행 편의를 개선하며, 메카에 분수식 물ுத는 곳을 설치하여 메카로 향하는 순례자들의 어려움을 덜어주려고 했다. 역사학자 M.A. 샤반은 알 왈리드가 시리아나 히자즈의 도시에서 실시한 사업에는 "실용적인 목적"도 있었지만, 주로 도시에서 증가하고 있던 비 아랍계 주민에게 저렴한 노동력 형태로 고용을 제공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추측했다.
사회 복지 사업에는 빈곤층에 대한 재정 지원이나 장애인을 지원하기 위한 간병인 제공 등이 포함되었지만, 이러한 노력은 시리아에 한정되었고, 더 나아가 아랍계 이슬람교도만을 대상으로 했다. 이 때문에 샤반은 이를 "지배 계급에 대한 특별한 국고 보조금"이라고 간주했다.
6. 3. 종교 건축 후원
알 왈리드는 아버지 압드 알 말리크가 예루살렘에 바위 돔을 건설한 것을 본받아 대규모 종교 건축 사업을 적극적으로 후원했다.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메디나 등 이슬람 세계의 주요 도시에 대형 모스크를 건설하거나 확장하는 데 막대한 자금을 지원했다. 이러한 건축 사업은 알 왈리드의 정치적 정당성과 종교적 권위를 과시하고, 이슬람의 위상을 높이는 데 기여했다.특히 다마스쿠스 우마이야 모스크는 알 왈리드 시대의 가장 위대한 건축 업적으로 꼽힌다. 알 아크사 모스크와 예언자의 모스크 재건축에도 힘을 쏟아 이슬람 건축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알 왈리드가 헤자즈 지역에서 확장한 다른 모스크로는 메카의 카바를 둘러싼 마스지드 알 하람과 타이프의 모스크가 있다.
6. 3. 1. 다마스쿠스 우마이야 모스크

알 왈리드는 아버지의 예루살렘 바위 돔 건설을 대규모 건축 사업으로 발전시켰다. 다마스쿠스, 예루살렘, 메디나에 대형 모스크를 후원한 것은 그의 정치적, 종교적 정당성을 강조했다. 그가 다마스쿠스에 세운 우마이야 모스크는 그의 통치 기간 중 가장 위대한 건축 업적이었다. 그의 전임자들 아래에서 무슬림들은 4세기 기독교 대성당인 세례자 요한에게 부속된 작은 무살라|기도실ar에서 예배를 드렸다., 알 왈리드 통치 시기에는 이 무살라ar가 급증하는 무슬림 공동체를 감당할 수 없었고, 다마스쿠스에는 대규모 집회 모스크를 위한 충분한 공간이 없었다. 705년에 알 왈리드는 대성당을 모스크로 개조하고, 지역 기독교인들에게는 도시의 다른 재산을 보상했다.,
이 과정에서 구조물 대부분이 철거되었다., 알 왈리드의 건축가들은 철거된 공간에 큰 기도실과 이중 아케이드가 있는 폐쇄된 현관으로 모든 면이 둘러싸인 안뜰을 만들었다. 모스크는 711년에 완공되었다. 건설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약 45,000명에 달하는 다마스쿠스 군대의 봉급 4분의 1을 9년 동안 세금으로 징수했다., 역사학자 니키타 엘리세에프는 대형 모스크의 규모와 웅장함이 "이슬람의 정치적 우위와 도덕적 위신의 상징"이 되었다고 평가했다. 힐렌브란드는 알 왈리드가 건축의 선전 가치를 인식하고 있었으며, 모스크를 "이슬람의 우위와 영속성에 대한 가시적인 선언"을 의도한 "승리의 기념비"라고 불렀다. 이 모스크는 오늘날까지 원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예루살렘에서 알 왈리드는 아버지의 성전산 공사를 계속했다. 알 아크사 모스크가 성전산의 바위 돔과 같은 축에 건설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여러 건축 역사학자들은 압드 알-말리크가 이 프로젝트를 의뢰했고 알 왈리드가 그것을 완성하거나 확장했다고 주장한다. 알 왈리드의 모스크 건설 작업을 보여주는 가장 초기의 자료는 아프로디토 파피루스이다. 여기에는 708년 12월부터 711년 6월까지 이집트 총독 쿠라 이븐 샤리크와 상 이집트의 관리가 "예루살렘 모스크" 건설을 돕기 위해 이집트 노동자와 장인을 파견하는 것에 대해 논의한 편지가 포함되어 있다. 성전산의 남쪽과 동쪽 벽 맞은편에 건설된 미완성 행정 및 주거 구조는 알 왈리드 시대에 지어진 것으로 보이며, 그는 이를 완성하기 전에 사망했다.
706년 또는 707년에 알 왈리드는 우마르 이븐 압드 알-아지즈에게 예언자의 모스크를 메디나에서 대폭 확장하도록 지시했다., 이 재개발에는 무함마드의 아내들의 거주지를 철거하고 무함마드와 최초의 두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와 우마르의 무덤을 포함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무함마드의 집을 철거하는 것에 대한 지역 종교계의 격렬한 반대는 알 왈리드에 의해 무시되었다. 그는 재건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모자이크와 그리스 및 콥트 장인을 제공했다. 힐렌브란트에 따르면, 칼리프의 본거지였던 메디나에 대규모 모스크를 건설한 것은 알 왈리드가 "자신의 뿌리와 이슬람 자체의 뿌리"를 "인정"하는 것이었고, 우마이야 왕조 시대에 메디나의 정치적 중요성을 시리아에 빼앗긴 것에 대한 메디나의 불만을 달래려는 시도였을 것이다. 맥밀란은 모스크와 순례자들에게 이익이 되는 사업은 우마이야의 683년 메카 포위와 692년 및 내전 중 알-하라 전투로 인한 "정치적 피해에 대한 건설적인 균형추"이자 "화해의 한 형태"였다고 설명한다. 알 왈리드가 헤자즈에서 확대한 것으로 여겨지는 다른 모스크로는 성역 모스크 (메카의 카바)와 타이프 모스크가 있다.
6. 3. 2. 예루살렘 알 아크사 모스크
알 왈리드는 아버지 압드 알 말리크가 예루살렘에 바위 돔을 건설한 것을 본받아 대규모 건축 사업을 추진했다. 특히 알 아크사 모스크 건설은 그의 주요 업적 중 하나로 꼽힌다.알 왈리드가 알 아크사 모스크 건설을 주도했는지, 아니면 아버지의 사업을 이어받아 완성했는지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몇몇 건축 역사가는 압드 알-말리크가 건설을 시작하고 알 왈리드가 완성했거나 확장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알 왈리드가 처음부터 건설을 주도했다는 주장도 있다.
알 왈리드의 모스크 건설 참여를 보여주는 가장 오래된 자료는 아프로디토 파피루스이다. 이 파피루스에는 708년 12월부터 711년 6월까지 이집트 총독 쿠라 이븐 샤리크와 상 이집트 관리 사이에 오간 편지가 포함되어 있는데, 이들은 "예루살렘 모스크" 건설을 돕기 위해 이집트 노동자와 장인을 파견하는 것에 대해 논의했다.
성전산 남쪽과 동쪽 벽 바깥에 건설된 알 아크사 모스크에 인접한 미완성 행정 및 주거용 건물은 알 왈리드 시대에 지어졌지만, 그가 사망하면서 완공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6. 3. 3. 메디나 예언자 모스크
706년 또는 707년에 알 왈리드는 우마르 이븐 압드 알아지즈에게 메디나의 예언자의 모스크를 대폭 확장하도록 지시했다., 이 재개발에는 무함마드의 아내들의 거주지를 철거하고 무함마드와 최초의 두 칼리프인 아부 바크르(재위: 632년~634년)와 우마르의 무덤을 포함하는 것이 포함되었다.,, 무함마드의 집을 철거하는 것에 대한 지역 종교계의 격렬한 반대는 알 왈리드에 의해 무시되었다. 그는 재건에 막대한 자금을 쏟아붓고 모자이크 제작을 위해 그리스 및 콥트 장인을 제공했다. 힐렌브란트에 따르면, 이슬람 국가의 최초 중심지였던 메디나에 대규모 모스크를 건설한 것은 알 왈리드가 "자신과 이슬람 자체의 뿌리"에 대한 "감사"이며, 우마이야 왕조 아래에서 시리아에 도시의 정치적 중요성을 빼앗긴 메디나 사람들의 원한을 달래려는 시도였을 수 있다. 맥밀란의 말에 따르면, 이 모스크와 두 성지 순례자를 위해 기울인 노력은 제2차 내란 중 우마이야 왕조가 메카에 가한 683년 포위전과 692년 포위전, 그리고 메디나 공격으로 인한 "정치적 손실에 대한 건설적인 보상... 일종의 화해"였다. 알 왈리드가 히자즈에서 확장한 것으로 여겨지는 다른 모스크에는 메카의 카바를 둘러싼 마스지드 알 하람과 타이프의 모스크가 있다.7. 죽음과 계승
알 왈리드는 다마스쿠스 외곽의 우마이야 겨울 별장인 데이르 무란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715년 2월 23일 알-하자즈가 사망한 지 약 1년 후였다. 그는 바브 알-사기르 또는 바브 알-파라디스 묘지에 묻혔고, 우마르 이븐 압드 알-아지즈가 장례 기도회를 이끌었다.
알 왈리드는 그의 아들 압드 알-아지즈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술라이만이 알 왈리드의 뒤를 잇도록 한 아버지의 약속을 무효화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두 형제 사이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술라이만이 즉위하여 알 왈리드의 거의 모든 총독을 해임했다. 그는 알 왈리드와 압드 알-말리크의 군사적 정책을 유지했지만, 칼리프국의 확장은 술라이만 치세(خِلافة سُلَيْمَان بْن عَبْد الْمَلِك|힐라파 술라이만 이븐 압드 알-말리크ar, 715년-717년) 하에서 거의 멈췄다.
8. 유산과 평가
조르지오 레비 델라 비다는 "알 왈리드 칼리파 치세는 압드 알 말리크의 오랜 노력으로 심어진 씨앗의 수확을 보았다"라고 평가했다. 샤반은 알 왈리드의 통치가 아버지의 통치를 모든 면에서 그대로 이어받아 평온을 유지했으며, 하자즈는 권력을 유지했을 뿐만 아니라 더욱 강화되었고, 정책도 유사하게 유지되었다고 평가했다. 샤반은 이 기간의 안정 덕분에 알 왈리드가 국내에서 압드 알 말리크와 하자즈의 정책의 영향을 더욱 발전시킬 수 있었다는 점을 유일한 차이점으로 꼽았다.
역사가 제럴드 호팅은 하자즈가 맺은 압드 알 말리크와 알 왈리드의 통치가 "여러 면에서 우마이야 왕조 통치의 절정기를 보여주며, 동서 양 지역에서 현저한 영토 확장을 경험했으며, 국가의 공적인 면에서 아랍적, 이슬람적 성격이 더욱 뚜렷하게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알 왈리드의 통치는 대체로 국내적으로 평화와 번영의 시대였다. 케네디는 그의 통치에 대해 "눈부신 성공을 거두었으며, 아마도 우마이야 왕조 통치의 전성기를 상징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케네디는 이러한 성공에서 알 왈리드의 직접적인 역할은 분명하지 않으며, 그의 가장 큰 공적은 우마이야 가문과 군대 내의 대립하는 파벌 간의 균형을 유지한 것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9세기 역사가 우마르 이븐 샤바에 따르면, 시리아의 동시대 사람들은 히스파니아, 신드, 마와라 안나흐르 정복, 다마스쿠스와 마디나의 대 모스크에 대한 후원, 자선 사업 등 통치 기간 동안의 공적을 통해 알 왈리드를 "칼리프 중 가장 가치 있는 인물"로 여겼다. 알 왈리드의 공식 궁정 시인이었던 알 파라즈닥은 알 왈리드와 그의 아들들에게 여러 찬가를 바쳤다. 알 파라즈다크와 동시대 시인인 자리르 이븐 아티야는 칼리프의 죽음을 애도하며 "눈이여, 추억이 불러일으키는 넘쳐나는 눈물을 흘리라, 오늘 이후에는 눈물을 담아두어도 의미가 없으니."라고 읊었다. 기독교 시인인 알 아흐탈은 알 왈리드를 "신의 순나를 통해 비를 구하는 신의 칼리프"라고 불렀다.
벨하우젠은 알 왈리드가 이전 칼리프에게는 보이지 않았던 군주제가 가진 겉치레를 기꺼이 활용했다고 말했다. 알 왈리드는 데이르 무란과 시리아 북부의 후나시라 등에 존재했던 몇몇 궁전에 살았다. 국고에는 상당한 부가 있었기 때문에 알 왈리드는 친족을 위해 엄청난 자금을 낭비할 수 있었다. 늘어나는 우마이야 가문의 왕자들 사이에서 이러한 증여에 대한 기대는 알 왈리드의 후계자들에게서도 이어졌다. 역사가인 칼리드 야히야 블랭킨십은 이러한 왕자들에 대한 후한 봉급과 비용이 많이 드는 사적인 건축물 제공은 국내의 "거의 모든 다른 사람들"로부터 반감을 사 "국고 고갈"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또한 정복을 추진하는 군대의 장비와 보상에 드는 비용은 더욱 중요한 지출이었다. 압드 알 말리크와 알 왈리드 치하에서의 이러한 막대한 지출은 양자의 후계자들에게 재정적인 부담이 되었고, 국가의 경제가 의존했던 전리품 유입도 후계자들 치하에서 감소하기 시작했다. 블랭킨십은 717년부터 718년까지 이어진 콘스탄티노플 포위전에서 입은 막대한 손실만으로 "알 왈리드 치하에서 얻은 이익은 사실상 사라졌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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